미국 독립선언문 (Declaration of Independence)
1776년 7월 4일, 대륙회의에서
미국 13개 연합 주의 만장일치 선언문의 일부 내용
"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자명하다고 믿는다.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, 창조주는 그들에게 몇 가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, 그중에는 생명, 자유,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다.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, 정부가 사람들 사이에 조직되며, 그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유래한다.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, 국민은 그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하고,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여, 그 기초를 그러한 원칙 위에 놓고, 그 권력을 그러한 형태로 조직함으로써 그들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루도록 할 권리가 있다."
미국의 독립 기념일 (Independence Day)
- 미국의 독립 기념일은 1776년 7월 4일 당시 영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13개의 영국 식민지가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 홀에서 영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.
- 실제 독립을 결의한 날은 7월 2일인데 이 독립 결의를 대중에게 알리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수정하느라 독립결의와 동시에 선언을 하지 못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독립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.
- 독립 선언이 있고 나서 1783년 9월 3일에 비로소 미국은 '파리 조약'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8년만에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.
- 미국 독립선언문(Declaration of Independence)은 대륙회의에서 발표되었습니다. 선언문 작성의 주된 인물은 토머스 제퍼슨(Thomas Jefferson)입니다. 제퍼슨은 초안을 작성한 후, 벤저민 프랭클린(Benjamin Franklin), 존 애덤스(John Adams), 로저 셔먼(Roger Sherman), 로버트 리빙스턴(Robert Livingston)과 함께 수정 작업을 거쳐 7월 4일 발표하였습니다.
- 오늘날 미국에서는 7월 4일을 독립 기념일에 전국적으로 불꽃놀이, 퍼레이드, 콘서트, 바비큐 등 다양한 축제를 열고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.
독립선언의 배경
- 1762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왕 조지 3세와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(1765년), 타운젠드법(1767년)과 같은 법으로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하여 과도한 과세와 지배 강화로 압박 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영국의 주민들이 영국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.
- 특히 '대표 없는 과세(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)'라는 구호 아래 미국에 이주한 영국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영국 의회가 자신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반발했습니다.
- 이러한 갈등은 보스턴 차 사건 등으로 폭발하게 되었고 결국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습니다.
독립선언서 작성과 채택
- 1776년 6월, 제2차 대륙회의는 독립 선언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.
- 이 위원회에는 토마스 제퍼슨, 벤저민 프랭클린, 존 애덤스, 로저 셔먼, 로버트 리빙스턴이 포함되었습니다.
- 이 중 토마스 제퍼슨이 주도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이후 다른 위원들의 수정과 검토를 거쳐 최종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습니다.
-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2일에 대륙회의에서 독립 결의를 하고 7월 4일에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발표되었습니다.
독립 전쟁과 파리 조약
- 독립선언 후에도 미국과 영국 간의 전쟁은 178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.
- 약 8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 9월 3일,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1784년 5월 12일에 발효되었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.
보스턴 차 사건 (The Boston Tea Party)
-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12월 16일에 발생하였으며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 중 하나입니다.
- 이 사건은 영국 정부의 과도한 과세 정책에 대한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.
사건의 배경
- 1760년대부터 영국은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에 여러 가지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.
- 이러한 세금 중 하나가 바로 '차 법(Tea Act)'이었습니다.
- 1773년에 제정 된 '차 법' 영국 동인도 회사가 미국 식민지에 차를 독점적으로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.
- 이 법은 동인도 회사의 재정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식민지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과세로 받아들여졌습니다.
- 특히 식민지 주민들은 '대표 없는 과세(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)'에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며 영국 의회가 부과하는 세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했습니다.
사건의 전개
- 1773년 12월 16일,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 회사의 배에서 차(Tea)가 하역될 예정이었는데 이에 반발한 보스턴의 급진적 식민지 주민들이 밤중에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배에 올라가 약 342 상자에 달하는 차를 바다에 던졌습니다.
- 이 사건은 오늘날 약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에 해당하는 1만 파운드 상당의 차를 바다에 버린 것입니다.
사건의 여파
-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주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습니다.
- 이러한 억압적인 조치들은 '참을 수 없는 법(Intolerable Acts)'으로 알려지며 식민지 주민들의 반감을 더욱 부추겼습니다.
- 이로 인해 식민지 주민들은 더욱 결속하게 되었으며 대륙회의를 소집하여 영국에 대한 저항을 조직적으로 준비하여 독립을 결의하게 되었습니다.
- 이는 결국 1775년에 발생한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로 이어졌고 미국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.
결론
- 보스턴 차 사건은 식민지의 영국 주민들의 단순히 과한 세금에 대한 반발을 넘어 미국 독립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.
- 이 사건을 통해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미국 독립혁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.
- 오늘날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의 독립과 자유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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